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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119

성삼문 본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死六臣) 한 사람이다. 1418년(태종 18년) 무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 '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은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 1435년(세종 17)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였고, 경연 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右司諫),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예조 참의(參義),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좌부승지(右/左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 2023. 8. 10.
장원 - 애사 옛날 뛰어난 장수는 병사를 육성할 때 마치 자식을 가르치듯 했다. 위난의 상황이 닥치면 몸소 전면의 나섰고, 공을 논할 때는 몸소 뒤로 물러 났다. 부상병을 대하면 울며 다독였고, 전사자에게는 크게 애도하며 후하게 장사 지냈다. 병사가 굶주리면 자신의 음식을 내주고, 추위에 떨면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지모가 있는 예의를 갖추어 후대하며 녹봉을 주고, 용감한 자는 크게 포상하며 격려했다. 장수가 이 같이 할 수 있다면 가는 곳마다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이다. 2023. 8. 9.
김종서 1383년(고려 우왕 9) 전라남도 순천에서 도총제로 봉직하던 무관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동안 맡았다. 또한 여진족들의 정세를 탐지·보고하고, 그에 대한 대비로 비변책을 지어 건의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변방에서 중앙의 관직을 맡았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 2023. 8. 9.
맹사성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개성 출생.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2023.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