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3년(고려 우왕 9) 전라남도 순천에서 도총제로 봉직하던 무관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동안 맡았다. 또한 여진족들의 정세를 탐지·보고하고, 그에 대한 대비로 비변책을 지어 건의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변방에서 중앙의 관직을 맡았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대신으로 역할했다. 1440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예조판서·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고 1449년 권제(權踶) 등이 고친 《고려사(高麗史)》가 잘못되었다 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하였다. 그는 변방의 장수에서 역사서 편찬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거쳐 1450년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정분(鄭苯)과 함께 좌의정으로서 문종의 마지막 유명(遺命)을 받아 12세의 어린 단종(端宗)을 보필하였다.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명신(名臣)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후의 세조)에 의하여 1453년(단종 1)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되고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復官)되었으며,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 저서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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