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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독립운동가 - 이상재

by 마릉손빈 2023. 7. 29.

본관 한산(). 호 월남(). 본명 계호().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조사 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 동행하였던 홍영식(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이 되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로 학무국장()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법부참사관()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 및 중추원 1등의관()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이상설()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 회장이 되어 베이징[]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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